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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연극 리뷰] 王家의 담담한 몰락, 그래서 더 비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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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은하수

2014 서울연극제 참가작인 이 작품은 보기 드문 시대극의 수작(秀作)이다.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장엄한 나락의 세계다. 현실에서 '몰락'이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어셔가의 몰락'처럼 '두 동강이 난 저택이 음울한 늪 속으로 침몰'하는 식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 영락(零落)의 분계선을 이미 밟았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옛 영화(榮華)를 회고하면서 말이다.

연극 '거울 속의 은하수'(신은수 작, 신동인 연출)에서 '거울'이란 덧없는 과거의 허상을 상징한다. 시점은 일왕의 항복 선언일인 1945년 8월 15일 전후, 공간은 고종 황제의 5남 의친왕 이강(박용수)의 저택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사망하고, 일본에 살던 장남 이건(신용욱)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와 그를 못마땅해하는 의친왕과 사사건건 대립한다.

현대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작 극은 가족 간의 갈등을 벗어난 커다란 요동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잔잔하게 흘러간다. 가족의 숫자와 관련한 반전(反轉)이 한 가닥 있지만 예측 가능한 수준이다. 항복 방송 직후에도 이를 짐작했던 일본인 호리바(김왕근)는 담담하게 독서를 하고 있고, 이건은 별다른 감흥 없이 일본으로 돌아간다.

가장인 의친왕은 여전히 과거의 '거울'에 갇혀 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서한을 의기양양하게 펴 보며, 곧 왕조를 부흥시켜 옥좌에 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왕 전하께서는 황실 핏줄을 없애려는 일본에 맞서 자식을 생산하는 투쟁을 계속하셨다"는 웃지 못할 대사도 등장한다. 여기에 현실적인 '찬물'을 끼얹는 인물이 이건이다. "일본이 망하면 이왕가는 지원이 끊겨 전부 거지꼴이 될 테니, 굶고 싶지 않으면 나가서 팥죽 장사라도 할 준비들이나 하십시오!"

극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의친왕비(최형인)다. 수시로 세파와 충돌하는 인물들 속에서 오직 그만이 시종일관 옛 왕실 복식을 갖춰 입은 채 흐트러짐 없이 중심을 잡지만, 옛 영화의 화석과도 같은 캐릭터여서 오히려 비극성을 더한다. 우아한 왕실 가족사진과도 같은 마지막 장면은, 허상의 광휘가 클수록 낙일의 비장미(悲壯美)는 그것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나라도 개인도 모두.

▷2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2)889-3561~2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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