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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전쟁과 승리의 기억…글자 경(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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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17〉글자 경(京)의 비밀

서양의 개선문처럼… 전쟁승리 과시 위한 조형물서 유래

전쟁의 승리는 엄청난 일이다. 그래서 전승(戰勝)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그 성과를 과시하고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한 다양한 사물(事物), 즉 이야기와 기념물을 낳는다. 서사시(敍事詩)와 개선문(凱旋門)이 대표적이다.

기원전 800년쯤의 그리스 시인인 호메로스(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전쟁에 얽힌 신화와 역사의 서사시(에픽·epic)다. 그의 작품은 서사시의 기원으로, ‘얼굴마담’으로 꼽힌다. 한자 문화권의 ‘삼국지’(삼국지연의)는 재미를 위해 가공의 이야기를 보태기는 했을지언정 전쟁을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서사시의 측면이 강하다. 전쟁은 이야기의 큰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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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이 열리고 있다. 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궁궐의 성문은 원래 적군의 시체를 쌓아 승리를 과시하는 고대 중국의 조형물 ‘경(京)’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호머, 삼국지의 가공품들은 지금도 세계의 정서를 움직인다. 이런 이야기들이 자칫 우리네 사람들의 ‘우주’ 또는 세계관이 될 수도 있다. 디즈니나 할리우드는 군사력과는 또 다른 힘을 가진다. 특히 우리나라의 사정, 삼국지의 이야기를 21세기 우리 자녀들에게까지 처세 교훈으로 강요하는 분위기는 참 딱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을 왜 아이들이 외워야 하지?

전쟁, 그 거센 소용돌이 속의 사람들에게는 서사시의 정서와는 다른 희비(喜悲)가 소용돌이친다. 태평양전쟁 참전 기억을 토대로 1948년 하버드대 출신 노먼 메일러가 쓴 소설 ‘나자(裸者)와 사자(死者)’는 “전쟁에서는 결국 발가벗겨진[裸] 사람과 죽은 자만이 남는다”라는 큰 반전(反戰) 메시지를 담았다. 그러나 역사는 ‘나자’건 ‘사자’건 별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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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승리는, 서양에서는 개선문과 같은 거대한 조형물을 낳았다. 프랑스 파리의 상징 중 하나인 에투알 개선문. 세계일보 자료사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의 에투알 개선문과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광장의 카루셀 개선문은 관광자원이며 그들의 긍지다. 동북쪽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산) 언덕은 과거 전투가 남긴, 적군을 포함한 시체를 묻은 곳이다. 그 위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섰다. 자기네들의 전쟁 영웅은 국립묘지 격인 팡테옹에 따로 모셨다.

인류의 새벽, 이집트 고대문명의 상징으로 스핑크스가 지키는 피라미드와 함께 오벨리스크(길고 뾰쪽한 문자탑)를 앞세운 거대한 탑문(塔門·tower gate)이 꼽힌다. 나일강 기슭 여기저기에 세워진 파라오 추모 사원의 간판에 해당하는 이 탑문은 개선문과 의미가 같다. 아부심벨, 룩소르 사원 등 우리에게도 유명한 람세스 2세의 기념물들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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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를 기리는 오벨리스크(왼쪽 일부가 보이는 기둥)가 간판 역할을 하는 이집트 룩소르 사원 입구의 탑문(塔門). 문자나 상징들로 보아 전승기념물이다.


유럽 전쟁의 역사는 이렇게 건축물로 우뚝하다. 한자 문화권의 전쟁과 승리의 기억은 무엇으로 남았을까? 결코 낯설지 않은 글자 ‘경(京)’이 바로 서양의 개선문처럼 힘의 과시를 위한 승리의 상징이다. 전쟁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뜻을 담기도 했겠다. 워낙 뜻밖이라 긴가민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다. 중국에서조차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니 오죽하랴.

서양의 개선문과 같은 의미의 조형물이었을 것이라고 문자학은 설명한다. 으스스한 얘기, 전투에서 벤 적의 머리[수급(首級)]로 크고 높은 기념물을 쌓았다. 이 모양의 그림이 글자가 됐다. 경(京)이다. 이 글자가 인신(引伸), 즉 의미를 당기고 펴는 과정을 거쳐 ‘높다’, ‘크다’는 뜻으로 확대됐다. 공자의 ‘춘추(春秋)’를 해설한 ‘좌씨전’ 등을 토대로 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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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王陵) 동네인 대릉원 공원과 첨성대 등이 보이는 경북 경주 시가지의 항공사진. 나라 이름이기도 했던 ‘서라벌’이 ‘서울’의 어원이란다. 그 서라벌 중심을 ‘경성(京城)’이라고 했다. 경주시 제공


원한에 사무친 적군의 뼈를 짓이겨 만든 탑이 갖는 주술적(呪術的)인 힘, 즉 마술이 잘 통하기를 기대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 대륙뿐 아니라 문명 이전 고대 여러 겨레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인류학적·고고학적 흔적과 이를 다시 구성하는 시도는 인류란, 또 사람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한 힌트이기도 할 터다.

경관(京觀)이란 단어를 사전은 ‘큰 구경거리’라고 푼다. 좀 큰 사전은 ‘전공(戰功)을 보이기 위해 적의 시체를 높이 쌓고 크게 봉분(封墳)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승리를 뻐기기 위해 시체를 쌓아 산 같은 무덤을 꾸몄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멋진) 경치’의 뜻 경관(景觀)과 겉은 비슷하나, 한자가 다른 것처럼 근본이 다르다. 문자의 역사를 품은 이미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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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京)’ 글자의 변천. 위로부터 갑골문 금문 소전(小篆) 예서(隸書). 지금 우리가 쓰는 글자(체)는 예서 다음 단계인 해서(楷書)다. 요즘 중국은 해서체 일부 글자를 간략하게 만든 간화자를 쓴다. 이락의 지음, ‘한자정해’에서 발췌했다.


개선문의 의미로서의 경(京)은 역사 속으로 스러지고 오늘에 와서는 ‘서울’, 즉 수도(首都)를 이르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베이징, 즉 북경(北京)은 중국의 서울이다. ‘서울’은 한국 수도의 이름(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한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도시라는 일반명사로도 쓰인다.

서울(수도)의 영어 ‘capital’[캐피털]의 어원이 라틴어 ‘caput’, 우리말로 ‘머리’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자본’인가 하면 ‘크다’, ‘중요하다’의 뜻이기도 한 이 말이 경(京)자처럼 ‘머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니. 동양과 서양의 ‘머리’는 인류학 개념인 원형(原型·prototype)의 본보기인가? 원형은 어느 지역의 어떤 족속이건 원래 공통적으로 지니는 생각과 행동양식을 말한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우리 역사에는 신라 때 이미 경성(京城)이란 지명의 기록이 있다. 김유신의 동생 보희가 (홍수로) 큰물이 ‘경성’에 가득한 것을 보는[…見大水?滿京城(견대수미만경성)…] 꿈을 꾼다. 비단치마를 받고 동생 문희에게 꿈을 판다. 꿈의 힘이었을까? 문희는 삼국통일을 이룬 김춘추(무열왕)의 왕비가 된다. ‘화랑세기’의 한 대목. 일제 때 서울이 경성이기도 했다.

신라의 이름이었던 서라벌의 중심부를 이루는 성(城)을 경성으로 불렀을 수 있다. 학계 일부에서는 서라벌을 서울의 어원으로 추측한다. 왜지? 두 땅 이름은 어감(語感)도 흡사하다.

이차돈 순교(527년, 법흥왕 14년) 이후 삼국 중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에는 ‘원래 신라 땅은 부처님의 영토였노라’ 하는 불국토사상이 유행한다. 나라 이름까지 불교 성지의 이름을 딴 실라벌(實羅伐)로 썼고, 이는 ‘서라벌’이 됐다.

고대 인도의 고급 종교 언어인 산스크리트[범어(梵語)]로 표기한 불교 성지 이름이 한자로 음역(音譯)되어 중국에 들어갔고, 한자로 된 그 이름[‘실라벌’로 추측]을 신라가 자기네 말로 받아들여 쓴 것이 ‘서라벌’이라는 추론이겠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이나 녹음과 같은 자료가 없으니 소릿값 등을 확인할 수는 없다.

‘용비어천가’(1447년)에 나오는 ‘셔 ’, 곧 ‘셔블’과 ‘셔을’의 중간 정도 소릿값을 가지는 단어가 서울과 서라벌의 관계를 밝히는 열쇠다. 서라벌이 ‘서블’ 비슷한 소리로, 또 서울로 변했으리라는 것이다. 또 ‘서라’가 신라(新羅)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우리말 어원 얘기는 다양하다. 이 다양함은 우리 말글의 두께와 더께를 짐작하려면 고대 중국과 인도의 언어와 역사까지 거슬러야 하는 ‘글로벌’한 자세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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