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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All That Design] `예술이 된` 글씨체…세상과 소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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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3월 서울 시내에 'MADONNA(사진①)'라고 쓰인 현수막이 붙었다. 누가 만든 건지,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글씨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챘다. 이 현수막이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가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번째 주인공으로 한국에 온다는 걸 의미함을 말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마돈나라고 쓰인 현수막만 가지고 주인공을 유추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현대카드 고유 서체 덕분이었다. 'MADONNA'라는 문구가 현대카드가 만든 '유앤아이(Youandi)체'로 쓰인 덕분에, 추가 정보 없이도 이 현수막이 슈퍼콘서트 주인공을 알리는 힌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물론 마돈나가 비틀스 노래 'Lady Madonna'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만이 눈치챌 수 있는 트릭이 있었지만)

글씨체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글씨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힘을 주어 쓰는지, 각도나 표현 방법은 어떤지 등이 사람마다 다르다. 글씨가 지문처럼 개개인을 구별하는 감정 수단으로도 사용 가능한 이유다.

글씨체의 대량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되며 '타이포그래피(Typography)'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자 기록술'로 표현되는 타이포그래피는 복제를 전제로 한다. 같은 형태로 쓸 수 있도록 만든 글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글은 탄생 자체가 복제 가능한 인쇄본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타이포그래피로 시작한 문자로 볼 수 있다.

같은 리포트를 쓰더라도 명조체로 쓰는지, 굴림체로 쓰는지에 따라 문서 성격이 달라 보이는 것처럼 어떤 글씨체를 쓰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진다. 기업들이 자체 글씨체 개발에 나서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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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①


국내에서 가장 먼저 자체 글씨체를 개발하고 아직도 성공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 기업은 현대카드다. 2004년 발표된 현대카드 고유서체 유앤아이(Youandi)체는 현대카드 이미지를 '디자인 기업'으로 각인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현대카드는 현대자동차 그룹 안에 있기에 고유 심벌을 따로 만든다는 게 어려웠다. 당시 기업의 특성을 알릴 수 있는 수단으로 '글씨체'를 선택한 이유다. 유앤아이체를 만든 오영식 토탈임팩트 대표는 "서체를 이용해 CI를 만들면 심벌을 사용하지 않고 로고만으로도 구성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보자고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에게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앤아이체는 현대카드가 독자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했고 이미지뿐 아니라 알파벳 카드 등 상품을 만드는 데도 차용됐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회사 관련 사안은 모두 유앤아이체를 사용하고 이를 엄격히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카드의 성공 이후 국내에는 자체 글씨체를 개발하는 기업이 이어졌다. SK텔레콤이 개발한 '뫼비우스체', 다음이 개발한 '다음체' 등이 그 예다. '뫼비우스체'는 곡선과 직선을 조화시킨 글씨체로 감성과 이성의 공존을 의미한다. '다음체'는 세련되고 안정감 있는 폰트로 가독성을 향상시키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해 사용자들이 장시간 웹을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눈의 피로감을 최소화한 게 특징이다.

기업뿐 아니라 지자체도 개발에 나섰다. 서울시는 2009년 '서울남산체'를 발표했고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해 중소기업 전용 서체 '한마음체'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다. 일반적으로 문서프로그램에서 쓰는 서체 이용 가능 범위가 한정돼 저작권 비용 부담을 느끼는 중소기업들을 위해 만든 서체다.

서체가 기업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모 안에 꽉 채웠던 기존 한글체와 달리 네모를 벗어나게 디자인한 '안상수체'와 각 획의 아름다움을 살린 '안삼열체' 등이 그것이다. 특히 안상수체는 네모 안을 채우느라 모양을 변경해야 했던 기존 서체와 달리 경제적으로 만들어져 주목을 받았다.

기업이 고유체를 개발한 건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글씨체로는 단연 '헬베티카(Helvetica)'가 꼽힌다. 1957년 스위스 글씨체 개발회사 하스(Hass)에 다니던 막스 미딩거가 개발한 이 서체는 글자 끝 부분이 간결하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은 특징이 있다. 헬베티카라는 이름은 스위스 옛 이름인 '헬베티아'에서 유래했는데 덕분에 스위스 모더니즘의 대표주자가 됐다. 이 글씨체는 'BMW' 'THE NORTHFACE' 'Post-it' 'Jeep' '3M' 등 세계적인 기업의 CI에 쓰일 정도로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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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②


탄생한 지 50년이 넘도록 사랑받고 있는 덕에 헬베티카는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사진9)로도 만들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게리 허스트윗은 평범해 보이는 헬베티카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서체가 된 이유가 궁금해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영화는 하나의 서체가 단순히 디자인을 넘어 현대 시각문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살핀다.

헬베티카 외에 유명한 서체로는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를 위해 만들어진 '타임스 로만(Times Roman)', 펭귄북스 표지 서체로 사용된 '길 상스(Gil Sans)',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 컴퓨터에 기본으로 탑재된 '에어리얼(Arial)' 등이 있다.

쏟아지는 글씨체 개발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국내외 성공 사례만 본 기업들이 글씨체만 만들면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보는 이의 가독성이나 실용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장식성만 강조한 글씨체가 범람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씨는 누구나 많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이다. 타이포그래피가 디자인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하는 이유다.

[김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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