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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눈부시지만 눈물 겨운… 돌밭 일군 구들장논에 청보리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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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깊어가는 청산도의 봄

한국일보

4월 중순부터 5월 초까지 청산도는 노란빛과 풀빛의 눈부심으로 눈을 뜨기 힘든 섬이 된다. 도락리에서 당리로 오르는 농로를 트레킹 코스 삼아 산책하는 여행자들


전복회, 소라구이도 그냥 그랬고 조개찜도 심드렁했다. 포구 식당의 왁자한 저녁. 말투로 보아 왼쪽 테이블은 소백산 아랫자락쯤에서 온 동창들인 것 같다. 오른쪽 테이블은 멀지 않은 뭍에서 온 동네 계모임인 듯. 짐작대로 4월의 청산도는 붐볐다. 붐비는 건 좋은데 왜들 그렇게 목소리가 크신지. 왕왕거리는 소음 속에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고픈 마음이 들지 않아 국이나 한 숟갈 뜨고 일어서려 했다. 아, 그런데…

아마도 회 뜨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주인이 아무렇게나 된장 풀고 집히는 대로 재료를 던져 넣고 끓인 국이었을 것이다. 값도 이름도 없는 그 '국물' 속에서, 그러나 모자반과 바지락은 집된장과 어울려 투박하고 푸근하고 또 가냘픈, 흙과 바다의 마리아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맛을 표현하자면, 이 섬을 유명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드라마 제목을 따다 붙이는 게 적절할 것 같다. 봄의 왈츠.

만춘의 청산도 기행. 유채꽃 흐드러진 관광지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형형색색 등산복의 무리 대신 머리에 수건을 두른 몸뻬 차림을 따라가보는 걸음도 괜찮을 것이다. 어디나 그러하겠지만, 이 섬의 진짜 매력도 질박한 사람의 체취 속에 있다. 말하자면 곱게 썰어 옥돌 회접시에 얹은 전복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스테인리스 그릇 된장국의 진미. 이번 청산도 여행에선, 그걸 테마로 잡아 보자.

들에 구들을 놓은 억센 농군의 섬

"나가 시집올 적에 우리 친정 아부지가 '돌섬에 딸 준다' 그랬어. 이 섬에선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만 먹고 가면 부잣집 딸이라 그랬제."

청산도가 가장 아름답다는 4월. 어찔할 정도로 짙은 유채꽃의 노랑과 알이 배기 시작한 청보리 이삭의 눈부신 초록으로 섬은 부풀어오를 듯 화사하다. 하지만 그런 파스텔톤 봄은 사실 비교적 최근에 덧칠된 것이다. 본디 이 섬이 지닌 빛깔은 거무튀튀한 돌빛이다. 구들장논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곽은희(80) 할머니는 신경통에 약으로 끓여 마실 민들레를 다듬고 있었는데, 농사일에 대한 그니의 기억 맨 밑바닥엔 부쳐먹을 땅뙈기 한 뼘을 얻기 위해 돌과 씨름한 징글징글한 세월이 깔려 있었다.

"보면 알자너. 집도 담도 길도 다 돌이여. 원체로 청산엔 돌이 많았제. 흙이 귀했당께. 구들장논이란 것이 뭐시냐 하면, 흙을 애끼려고 돌을 깔고 그 위에다 흙을 부셔놓고 농사를 지어먹는 겨. 이걸 한 평 만들라면…워-메, 징한 거."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인 청산도 구들장논을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이달 초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했다. 평지가 좁은 청산도에선 오래 전부터 계단식 다랑이논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갈이 많아 담수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구들장논이다. 자갈, 진흙, 메흙을 층층이 쌓아 위에 농작물을 심고 아래론 물을 뺄 수구를 만들었다. 양지리와 상서리, 부흥리 등에 아직 농사 짓는 구들장논이 남아 있다. 상서리는 소박한 돌담이 정겨운 곳. 3억년 전부터 살았다는 투구새우를 여름이면 이곳에서 관찰할 수 있다.

청산 해녀의 푸른 숨비소리

출가라는 낱말은 뜻이 여럿이다. 집 가(家)에 계집 여(女)가 붙으면 시집간다(出嫁)는 뜻이고, 벼 화(禾)가 붙으면 고향을 떠나 돈을 벌러 간다(出稼)는 뜻이다. 청산도에선 출가를 두 번 한 어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 제주 출신으로 이 섬으로 물질을 하러 왔다가 결혼해서 아들딸 낳은 해녀들이다. 한창 땐 300명 이상, 청산에서 남자를 만나 정착한 해녀만도 100명은 됐다고 한다. 지금은 현역으로 딱 20명 남았다. 그것만 해도 출가해녀의 규모 치고 수가 많은 편이다. 전국 어디나 더는 해녀가 되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상군(물질을 제일 잘 하는 해녀)이 아니면 출가를 못해. 할망들이 지금도 나보다 밤생이(성게)를 잘 캐. 안그럼수까?"

젊은 축인 강정희(60) 아주머니가 망서리(채취물을 담는 자루)에서 성게를 꺼내 손질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해녀배에선 아직 제주도 사투리가 표준어다. 사실 청산도 해녀는 다른 곳에 비해 수입이 많지 않다. 어촌계에 속한 선주의 배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 이곳 규칙인데, 이리저리 떼고 나면 해녀의 수중에 남는 것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묵묵히, 해녀들은 이 섬의 가장 처연한 풍경을 몸으로 채우고 있었다. 물때에 따라 다르지만 해질녘이면 도청항에서 물질을 마치고 돌아온 해녀들을 만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싱싱한 전복과 해삼을 정말 싼 값에 살 수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떠 있는 섬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못 찾았다. '없었다'가 아니고 '못 찾았다'고 한 건 그 맥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를 바라는 뜻에서다. 청산도에선 죽음에 대한 관념, 또는 죽은 이를 대하는 태도가 뭍과 조금 다르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초분이다. 초분은 초상이 났을 때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이엉을 엮어 관을 덮어두고 몇 해 동안 놔두는 임시 무덤이다. 이렇게 두면 시신은 땅 위에서 뼈만 남게 된다. 서너 해 뒤 이엉을 걷고 뼈를 깨끗이 하는 '씻골'을 거쳐 땅 속에 모신다. 그리 해야 자식 된 도리를 다 한다는 남다른 정성이다. 몇 해 전까지 두세 기 정도 초분이 남아 있었다는데 이제 모두 매장을 마쳤다.

"우리 할매가 고상고상하면서 수절하셨응께…유복자이신 우리 아버님이 해방 나던 해 저걸 지으셨제. 옆의 것도 우리 집안 먼 친척 것인디, 그 집은 딸만 둘이라 사위가 세워줬다지 아마."

청산도엔 또 유난히 비석이 많다. 무슨 기념비인가 하고 가보면 대개 열녀비다. 홍살도 없고 풍벽도 없다. 나라에서 내려준 게 아니라 자식 손주들이 세운 비다. 지리 마을 김호(71) 할아버지 조모의 열효각은 후손들이 부쳐먹는 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바로 옆 것은 삐뚤빼뚤한 한글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날짜를 보니 세워진 지 40년 됐다. 비석뿐 아니라 무덤들도 논밭 한가운데 오종종 모여 있다. 청산도 사람들은 죽어서도 피붙이와 살가운 듯했다. 그 이유는 역시 바다와, 바다만큼 거칠었던 세월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당리 서편제 촬영장 곁과 연애바위 부근에 초분의 모형이 있다.

풍어와 수탈의 기억, 파시의 흔적

청산도 여행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 배를 내리고 타는 도청항은 1930년대부터, 고등어잡이가 아직 번성했던 1970년대까지 불야성을 이루던 곳이다. 간판과 용도는 바뀌었지만 파시의 기억을 간직한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좁은 골목을 걸어가면 삼치 파시 시대 선주들이 이용했던 요정과 선원들이 주로 찾던 술집, 잡화가게, 여관, 일제강점기 일본인을 상대하던 유곽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주변 바다에서 10여개 선단이 조업할 때는 도청항으로 들어오는 인구가 하루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40여년 고깃배를 몰다 은퇴했다는 정재우(70) 할아버지는 그런데, 지금도 4월이면 그때 못지않은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온다고, 그래서 이 거리가 영 쓸쓸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겁나, 겁나. 이 섬에 뭐 볼 게 있다고들 그렇게 찾아오는지…그래도 봄 한철이라도 북적북적허니 젊을 때 분위기가 나서 좋소."

항구가 봉긋하게 언덕을 이룬 자리, 옛 면사무소 건물에서 5월 11일까지 지역 주민들의 사진전이 열린다. 청산한의원 아줌마 이씨, 락펜션 할배 공씨, 대로수퍼 할배 정씨, 청해약방 할배 박씨 등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섬에서 나고 자란 이의 눈에만 비치는, 진짜 섬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완도=글ㆍ사진

■ 여행수첩

●30일까지 청산도 전역에서 '2014 청산도 슬로우 걷기 축제'가 진행된다. 하루 여덟 차례 있는 배가 축제 기간 19편으로 증편된다. 첫배 오전 5시50분, 마지막배 오후 6시(완도항 출발 기준). 기상 상황에 따라 운항 시간이 변경되니 미리 확인해야 한다. 차량도선 가능. 완도연안여객선 터미널 (061)550-6000 청산농협 (061)552-9388 ●섬 안에서 순환버스가 운행한다. 면사무소 부근 복지회관에서 당리(서편제 촬영지), 청계리(범바위), 양지리(구들장논), 상서리(돌담길) 등 주요 지점을 모두 버스로 갈 수 있다. 주중 10회, 주말 12회 운행. 해설사가 탑승한 투어버스도 축제 기간 운행한다. 청산버스 (010)6428-9432 ●청산도 내에 11개의 걷기 코스(슬로길)가 개발돼 있다. 축제 기간 공연, 장, 놀이마당 등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된다. 청산도 슬로시티 운영위원회 (061)554-6969 www.slowcitywando.com

유상호기자 shy@hk.co.kr

한국일보

청산도에서 가장 호쾌한 풍경을 보여주는 범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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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이 다랑이논의 형태를 이룬 구들장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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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수구. 논의 배수구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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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여물기 시작한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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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해녀들이 성게의 속살을 발라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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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리 돌담길에서 만난 익살스러운 표정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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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달에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느림보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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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리 돌담길을 걸어가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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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촬영지 부근에 만들어진 초분 모형. 죽은 이를 쉽게 떠나 보내지 못하는 섬의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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