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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그가 바라본 것, 낯선 서울… 영화 속 서울, 낡고 오랜 그곳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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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영화에서 집은 은유와 상징의 역할을 해왔다. <변호인>의 송강호는 세무 변호사로 돈을 번 후 웃돈까지 주고 아파트를 산다. 가난한 고시생 시절 막노동하며 지었던 아파트를 사들이면서 성공을 만끽한다. 아파트는 인생 역전의 상징으로 쓰였다. <건축학개론>에서 대학 선후배인 엄태웅과 한가인은 집 때문에 15년 만에 만난다. 한가인은 엄태웅에게 집 설계를 맡겼고, 이들의 집 짓기 과정은 첫사랑의 기억 찾기 여정으로 은유됐다.

숱한 영화의 배경이 된 서울에서, 오래된 건물 역할은 대단하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 건물이 올라가는 대도시에서 묵묵히 역사의 흔적을 담아왔다. 켜켜이 쌓아온 세월의 더께는 영화에서도 큰 역할을 해낸다. 이 건물들이 묘사하는 집은 빗나간 욕망이 분출되는 공간으로, 때로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때로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경향신문

영화 촬영지인 서울 종로구 동대문아파트는 ㅁ자형 구조라 채광이 좋다. 맑은 날이면 복도와 복도를 이어 연결한 빨랫줄에 어김없이 빨래가 걸린다. |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 영화 <숨바꼭질>의 동대문아파트

“서울에 사시는 분들이 누추한 아파트에 무슨 일로 …. 저희도 재개발 정보 좀 나눠주세요. 이번에 이사 가려고 하거든요.”

<숨바꼭질>의 손현주는 극중 형의 실종 소식을 듣고 형이 살던 아파트를 찾아간다. 소식을 수소문하다 이웃인 문정희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문정희는 손현주 가족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왠지 의뭉스럽다. <숨바꼭질>의 범인은 집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더 나은 집을 갈망하다 살인까지 저지른다. 아파트 평수나 위치가 계급의 상징처럼 작용되는 한국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지방의 한 아파트로 설정됐지만 실제 촬영지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동대문아파트다. 1965년 지어진 6층짜리 동대문아파트는 대한주택공사가 건축한 첫 아파트다. 중앙정원식 형식으로 가운데 마당을 두고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음산하게 비춰졌지만 가운데가 뚫린 곳으로 채광이 좋다. 가운데 빈 공간에는 도르레를 달아 줄을 끼우고 잡아당겨 빨랫줄로 쓴다. 가운데 널린 빨래가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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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있는 아파트인데도 아파트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1층 한구석엔 요즘 보기 힘든 공동 수도가 있고, 장독대도 묻혀 있다. 가스보일러를 설치한 집도 있지만 여전히 연탄 난방을 하는 가구들도 눈에 띈다.

지금은 오래된 아파트의 대명사처럼 됐지만 초기만 해도 연예인이 많이 살아 연예인 아파트로 불렸다. 40년 넘게 이 아파트에 산 한 주민은 “연예인 아파트라고 알려졌지만 판·검사나 교수도 많이 살았다”고 했다. 그는 “돈과 권세 있는 사람들의 둘째 부인들도 몇몇 살았는데,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까 오가기가 좋아서 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민은 “세 자녀를 이곳에서 대학도 보내고 결혼도 시켰다”며 “가족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은 55만원이었다고 했다. 인근 부동산에 알아보니 면적 28㎡인 동대문아파트 시세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었다. 1층에는 복사, 택배 업체 같은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다.

세입자는 자주 바뀌는 편이라고 한다. 50만원 월세를 못 내 1년을 못 채우고 쫓기듯 떠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연예인, 판·검사, 교수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중국 유학생이나 인근 동대문 상인들이 여럿 산다. 중국 유학생들은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통역을 해서 돈을 벌면서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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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곱게 늙은 한옥


■ 영화 <수상한 그녀>의 한옥집

<수상한 그녀>의 나문희가 맡은 오말순은 만석꾼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사랑하는 남자와 야반도주한 후 굴곡진 인생을 살게 된다. 쓸쓸한 노후를 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젊은 외모(심은경)를 얻는다. 달라진 외모 때문에 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박인환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박인환은 나문희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며 그녀를 흠모했던 인물이다. 종살이를 하던 그는 이젠 번듯한 집을 가졌으나, 인생이 꼬인 주인집 아씨는 하숙생이 된다.

박인환의 집으로 나온 한옥집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고운당이다. 100년된 한국 전통가옥으로 대들보, 서까래, 기와가 온전히 보존돼 있다. 각 방 천장이 서까래 원형 그대로 노출돼 있다. 마당에는 수령 250년이 넘은 향나무 두 그루가 정승처럼 서 있다.

제작사 예인플러스의 한상현 제작실장은 “서울 북촌과 삼청동, 전주 한옥마을, 대전 한옥마을 등을 한달 반이나 뒤지다가 겨우 찾아낸 집”이라고 말했다. 극중 하숙과 비슷한 형태인 게스트 하우스라는 점도 좋았고, 마당도 있어 안성맞춤이었다고 했다. 마당 수돗가만 영화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

10년 전만 해도 노부부가 거주하고 있었다. 아내가 죽은 뒤 남편은 한옥 생활을 불편해하는 자식들을 생각해 한옥을 팔고 이사했다. 한정식집을 거쳐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가 됐다.

2년 전 이 한옥을 산 윤정예씨는 사랑채에서 남편과 살면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중이다. 30년 넘게 아파트와 빌라에만 살다가 한옥으로 이사 오니 처음엔 불편한 게 많았다. 너무 추워서 겨울엔 손이 갈라질 정도였고, 부엌이나 화장실 갈 때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다. 한옥은 겨울엔 바람이 세다. 심은경이 머물던 방의 한쪽 벽은 광목을 덧대 웃풍을 막고 있었다.

불편함 대신 얻는 것도 있다. 윤씨는 “빗소리, 눈 내리는 소리, 바람소리가 방안에서 들린다”며 “한옥에 살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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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욕망의 탑 세운상가


■ 영화 <피에타>의 세운상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1995년 발표한 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2’에서 세운상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세운상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내 세포들의 상점을 가득채운 건 트레이시와 치치올리나/제니시스, 허슬러, 그리고 각종 일제 전자 제품들/세운상가는 복제된 수만의 나를 먹어치웠고/내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

세운상가는 종로3가와 퇴계로3가 사이에 위치한 상가단지이다.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완공됐다. 전기·전자 분야의 도심산업의 중심지로 호황을 누렸으나 1990년대 들어 쇠락했다. 한때 ‘빨간 비디오’로 불리는 불법 음란물이 유통돼 욕망의 허기를 채우는 곳이기도 했다. 세운상가는 1층에서 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주거공간으로 구성된다. 큰 길 쪽에는 은행, 카페가 있는 상업공간이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조명, 노래방기기, 불법 DVD 취급 상점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감시자들>과 <초능력자>를 찍은 송대찬 프로듀서는 “근대문화를 대변하고, 실제 소비까지 이뤄지는 독특한 공간”이라고 세운상가를 표현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대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는 세운상가 인근이 주된 배경이다.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이정진의 집이자 일터로 등장한다. 재개발의 소용돌이에 내몰린 상인들은 돈을 빌리고 이정진에게 시달린다. 이런 이정진 앞에 갑자기 조민수가 엄마라면서 찾아오고 두 사람은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김기덕필름의 김순모 프로듀서는 “세운상가가 없었으면 지금의 <피에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정진의 집은 개발된 청계천과 1970년대 모습이 남아있는 세운상가, 그리고 낡은 청계천 공장들이 있는 청계천의 중심이 창문으로 보이는 절묘한 곳”이라며 “<피에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어서 주인에게 삼고초려해 협조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돈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빠르게 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되고 돈의 논리 속에 피해자가 된다. 영화 내용을 세운상가처럼 잘 표현해 줄 곳이 또 있을까.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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